"여기가 사람들 불태워 죽인 곳... 숨어서 짐승처럼 살았다" [제주, 평화의 길 ②] 명진 스님이 "종교 없애기 운동을 하겠다"고 말한 까닭

김건중
2019-07-01
조회수 16

"여기가 사람들 불태워 죽인 곳... 숨어서 짐승처럼 살았다"

        [제주, 평화의 길 ②] 명진 스님이 "종교 없애기 운동을 하겠다"고 말한 까닭                     

19.06.20 18:49l최종 업데이트 19.06.20 18:49l

            

                김병기(minifat)             

                                                                                             

                
             '평화의 길' 이사장인 명진 스님이 4.3 평화기념관 앞의 동백꽃 형상물 옆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  "평화의 길" 이사장인 명진 스님이 4.3 평화기념관 앞의 동백꽃 형상물 옆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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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는 종교 없애기 운동을 할 겁니다. 하~하~하~"

지난 2일 오전 사단법인 '평화의 길' 이사장인 명진 스님이 제주 숙소 앞에서 함께 셀카를 찍으며 던진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며 전날 오후에 열린 '평화의 길' 제주지부(지부장 천영환) 창립식 때 스님의 인사말 한 대목이 떠올랐다.

"'북한이 침략해 오면 남한 사람 2천만 명이 북한사람 2천만 명이랑 같이 죽고 남은 사람들이 열심히 아기를 낳아 복원하자'. 이게 한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조폭도 이 정도는 아닙니다. 양아치라고 생각합니다.

돈 욕심으로 진로 하이트와 계약을 맺어 '감로수'라는 이름으로 절에 강매하면서 자기 동생이 있는 회사로 돈이 들어가게 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는 자승 전 총무원장 같은 사람. 그런데 '조계종 중이 하는 짓이 오일장에서 나물 캐는 사람 돈 뜯는 수준이라면 가톨릭은 마피아 수준'이라고 제게 말한 신부도 있습니다. 종교가 이 지경입니다.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스님이 말한 '종교 없애기 운동'은 종교가 제 역할을 못 하고 세상 사람들이 종교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기만 했을까? 명진 스님은 서울행 비행기를 타려고 숙소에 남았다. '평화의 길' 4.3 순례단은 이날 첫 일정으로 찾아간 마을에서 명진 스님이 말한 것과는 또 다른 부끄러움과 참담함에 휩싸였다.

[잃어버린 마을] 피로 물든 악몽을 소환하다
             무등이왓 마을의 학살을 증언하는 홍춘호 할머니.       
▲  무등이왓 마을의 학살을 증언하는 홍춘호 할머니.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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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홍춘호요."
"연세는요?
"여든둘."

이날 우리에게 길 안내를 한 할머니의 이름 석 자는 한동안 머릿속에서 각인될 것 같다. 그가 헤어지면서 나에게 건넨 마지막 말도 "기억해 달라" "잊어버리지 말아 달라"였다. 하지만 1시간 30여 분 동안 할머니와 함께 걸은 마을 길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의 길이었다.

'잃어버린 마을 무등이왓'. 마을 어귀에 있는 큰 표지석부터 눈에 들어왔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5개 부락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마을이었다. 무등이왓은 마을 형세가 무등을 타고 춤추는 아이의 모습을 닮아 붙인 지명이다. 평화 그 자체였지만 1948년 겨울, 군인 등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해안선 5km 이상을 적성 구역으로 규정하고 '초토화 작전'에 나서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됐다. 동광리 무등리왓마을은 제주 4.3의 첫 학살지였다.

"내가 11살 때 4.3 사건이 났어요. 무등이왓 마을에서 나고 자랐죠. 여기에 130호가 살았어요. 겨울이 따뜻해서 농사가 잘되고 잘사는 마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350명이 죽었어요. 마을 사람 3분의 1입니다."

350명. 이 숫자에는 그날의 잔혹함이 담겨 있지 않다. 하지만 이날 홍춘호 할머니와 함께 걸은 검은 돌담길은 달랐다. 집터만 남아 있고 개도 짖지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가 소환한 학살의 기억은 또렷했다.

"옛날에 여긴 집이 있었어요. 여긴 말방에터(연자방아터)였죠."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바람에 날리는 하얀 메밀꽃 주변으로 벌과 나비가 날았다. 그는 4.3 때 무등이왓 마을 최초 학살터인 '강귀봉 댁 우영 밭'으로 안내했다. 광평리에서 무장대토벌 작전을 수행하고 온 토벌대들이 들이닥쳤던 1948년 11월 15일이 학살의 시작이었다.

"오전 10시에 경찰이 주민들에게 이곳으로 나오라고 했죠. 대부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어서 4.3이 뭔지도 몰랐어요. 여기서 그때 10명을 불러서 마구 때리고 총을 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뒤 동네 사람들은 "무서워서 온종일 밭에 있다가 밤에 몰래 집에 가서 잠만 자면서 살았다"면서 "11월 20일 넘어서 제주도 전체가 불바다가 됐다. 하늘도 벌겋게 불탔다. 경찰이 포고령을 집행한다면서 해변 5km 이내의 집에 모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감자꽃] 자줏빛이 아닌 까닭
             4.3 학살의 흔적이 남아있는 제주 무등이왓 마을 집터에 감자꽃이 피었다.       
▲  4.3 학살의 흔적이 남아있는 제주 무등이왓 마을 집터에 감자꽃이 피었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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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부터 숲속과 굴속에 숨어 살았어요. 처음에 총 맞아 죽은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했죠. 나중에는 죽일 사람이 많아서 그랬는지, 사람들을 멍석말이해서 잔인하게 불을 붙였습니다. 발버둥치다가 살아남은 사람을 확인하면 서북청년단이 죽창으로 찔러 죽였어요."

그는 공고판에서 걸음을 멈췄다. 추곡수매나 여러 가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공고를 붙였던 곳이다. 1930년에 설립된 동광리 개량서당인 광신사숙 앞이었다.

"아이들이 항상 공고판 앞에 나와서 놀았습니다. 경찰이 어느 날 주민들을 여기에 모이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연설을 하니까 나오라고 한 거죠. 그런데 다 죽여 버렸어요. 임산부까지 죽창으로 찔러 죽였다니까요."

그가 가리킨 또 다른 학살터를 보니 이번엔 하얀 감자 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감자 꽃이 다른 곳에서 본 것보다 더 하얗게 보인다고 느껴졌을 때 문득 동천 권태응 시인의 '감자 꽃' 시구가 떠올랐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그날 땅 속에 스민 피를 기억한다면 자주 꽃이 펴야 마땅한 자리였다. 하지만 하얀 감자 꽃이 햇빛을 받아 서럽게 반짝였다.

[악몽의 연속] "단추공장에서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무등이왓 마을 잠복학살터.       
▲  무등이왓 마을 잠복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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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오름 꼭대기 굴에서 한 달 넘게 살았어요. 밤늦게 아버지가 굴속에 오시면 '너넨 살았구나. 누구누구는 죽었는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살아 있는 게 행복했어요. 동생 2명은 숲속에서 굶어 죽었고 한 명은 오름에서 내려온 뒤에 죽었어요."

그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는 커다란 팽나무 아래를 지나 잠복학살터 앞에 섰다. 파란색 그물로 입구를 막았는데 안쪽에는 잡초만 자라고 있었다.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는 자기들이 전날 학살한 양민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올 것을 예상하고 주변에 잠복해 있었다. 양민들이 나타나자 토끼몰이하듯이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았다고 한다.

"여긴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 곳입니다. 저 끝에 있는 메밀밭에서 29명이 죽었습니다. 죽창으로 찔러 죽이기도 했어요. 6식구 모두, 아이들 4남매도 불태워 죽였습니다. 토벌대가 온다고 하니까 화장실 돼지집 속에 숨었던 30살 아줌마는 살았습니다. 토벌대가 떠난 뒤 불에 탄 흙을 마구 파면서 울다가 대나무밭으로 굴러가서 살아난 아이를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는 나중에 우리랑 같이 숨어 살았습니다."

홍춘호 할머니는 그 자리에 서서 자기가 겪고 목격한 그 뒤의 상황을 이야기했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산에서 내려온 그는 수용소에 끌려가 수감생활을 했다.

"토벌대가 '지금 내려오면 살려준다'는 내용의 삐라를 뿌렸어요. 우린 흰 천을 맨 깃대를 흔들면서 손을 들고 내려갔습니다. 지서로 끌려갔죠. 거기서 감옥살이를 하는 데 마룻바닥 중간에 화장실이 있었어요. 처녀고 남자고, 할머니고 할아버지이고,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볼일을 봤습니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우리를 배에 태워 서귀포항에 내려놨습니다. 정방폭포 다리를 넘으니 소라 단추공장이 있었고 우리보다 먼저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젠 죽을 걱정은 좀 사라졌는데 배가 고팠습니다. 바가지로 손에 밥을 퍼주었는데 밥알 한 개라도 떨어지면 모두 달려들어 주워 먹었습니다. 마당의 풀도, 앞쪽 바닷가의 해초도 다 뜯어 먹었죠.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4월에 들어가서 9~10월에 수용소에서 나왔습니다."

[움막집] "9살 동생과 나만 살아남았다..."
             '평화의 길' 4.3 순례단이 무등이왓 마을을 걷고 있다.       
▲  "평화의 길" 4.3 순례단이 무등이왓 마을을 걷고 있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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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호 할머니는 그 뒤 '애기 업개'(식모)로 갔단다. 12살이었다. 그때 만난 아주머니는 친절했지만 무등이왓 마을 사람들은 '폭도 새끼' '석방쟁이'로 낙인이 찍혔다.

"서귀포 화순 쪽에 가니 집도 안 빌려줬어요.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움막을 한 개 빌렸습니다. 가마니를 그냥 두른 곳이에요. 동그란 입구로 들어가면 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살았죠. 옷도 너덜너덜했고 이불도 없이 살았어요.

14살 되던 해 겨울에 아버지가 죽었어요. 짚으로 시신을 싸서 나무 짐으로 져다 묻었습니다. 어머니는 동생이 9살 되던 해인 46살에 죽었어요. 저는 당시 23살이었고 움막집에는 동생과 나밖에 없었죠. 기가 막히게 살았습니다."

그의 동생은 지금 68세란다. 고통스러운 삶은 아니었는지 물었지만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아주 잘 살고 있고 지금 나는 대통령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2달 전부터 4.3 피해자로서 작지만 보상금을 받고 있다고 했다. 그동안 "어린 동생 3명이 죽었는데 신고조차 하지 않았다"면서 "아이들을 팔아서 돈을 탄다는 게 부끄럽기만 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죽이고 나 혼자 산 것을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 물도 밤에만 길었습니다. 아이들의 입에 좁쌀 물이라도 넣어줬으면 미안한 마음이 덜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한 것을 생각하면..."

2살, 5살, 8살 때 굶주림으로 죽은 남동생 세 명을 떠올리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큰넓궤] "정방폭포 위에서 총살... 나는 살아남았다"
             홍춘호 할머니가 무등이왓 마을 주민과 함께 40여일동안 숨어 살았다는 '큰넓궤' 입구.        
▲  홍춘호 할머니가 무등이왓 마을 주민과 함께 40여일동안 숨어 살았다는 "큰넓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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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호 할머니와 함께 마지막으로 간 곳은 철제 펜스로 막은 '큰 넓궤'였다. '궤'는 제주 곶자왈 지형에 형성된 동굴이다.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산 90번지. 제주 4.3 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은신 생활을 했던 곳이다. 1948년 11월 중순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자행된 뒤 주민들은 야산으로 흩어져 숨어 있다가 이곳으로 들어왔다.

"여기서 40~50일 정도 있었어요. 굴 입구에서 무릎으로 기어 10m 내려가면 나무 사다리가 있어요. 그걸 타고 내려가면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는 우리보다 먼저 온 삼밧구석 사람들이 숨어 있었어요. 그곳으로부터 7m 정도 엎드려 기어가면 높은 공간이 나오고 거기에서 사다리로 2m 올라가면 세모꼴 형태의 동굴이 나옵니다. 우리는 거기서 살았죠."

그의 기억은 또렷했다.

"여기서 불을 피우지 못했어요. 아버지는 이틀에 한 번꼴로 바깥에 나가서 불에 타다 남은 곡식을 맷돌로 갈아 물을 끓인 뒤 섞어서 헝겊이나 옷에 싸서 안쪽으로 가져왔어요. 굴속에는 먹을 물도 없었어요. 천정에서 떨어진 물이 바위 홈에 고이면 그곳에 입을 대고 빨아먹었습니다. 짐승처럼 살았죠."

인간 사냥꾼이었던 토벌대는 집요했다. 인질을 앞세워 '큰 넓궤'를 찾아왔다. 토벌대가 굴로 진입하려고 할 때 안에서 불을 피워 매운 연기를 바깥으로 내보내며 저항했다. 결국 토벌대는 바깥에서 총을 난사한 뒤 굴을 돌로 막아놓고 내려갔다.

다음 날 아침 토벌대가 다시 오기 전에 바깥에서 망을 보던 청년들이 돌을 치웠다. 삼밧구석 사람들은 한라산 영실 근방의 볼레오름으로 갔다. 홍춘호 할머니 일행은 다른 오름에 숨었다. 토벌대는 눈 위에 난 발자국을 추적해서 볼레오름으로 숨은 사람들을 죽였고 일부는 정방폭포까지 끌고 가서 총이나 죽창으로 학살했다. 이곳에는 당시 시신을 찾지 못해서 옷가지 등만 묻은 헛무덤이 있다.

할머니 일행은 다행히도 눈에 난 발자국이 바람에 쓸려 지워지는 바람에 살아남았다고 했다. 그는 오름에서 3월까지 숨어 살다가 백기 투항하면 살려준다는 전단을 보고 내려온 뒤 계속해서 비참한 삶을 이어갔다. '큰 넓궤'에서 살아남은 자의 증언은 끝이 났다. 그에게 '4.3은 무엇이었냐'고 물었다.

"최악이었어요."

그에게 평화의 섬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은 데 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4.3을 잊어버리면 다시 똑같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꼭 기억해야 합니다."

[평화의 길] 첫 지부를 제주도에 세운 까닭
             '평화의 길' 4.3 순례단이 큰넓궤에서 나와 홍춘호 할머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  "평화의 길" 4.3 순례단이 큰넓궤에서 나와 홍춘호 할머니와 기념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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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의 학살극은 무려 7년 7개월간 이어졌다. 무등이왓 마을처럼 잃어버린 제주마을은 109개에 달한다. 제주 전역에서 학살된 희생자는 무려 3만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날 오전 홍 할머니가 증언한 끔찍한 주검은 극히 일부였던 셈이다. 누가, 무엇 때문에 죽였을까?

아직도 제주 4.3의 실체적 진실은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4.3을 촉발한 미 군정은 사과하지 않았고 계엄령을 발동해 학살을 자행한 이승만은 일부 정치세력에 의해 여전히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대규모 살인을 지시한 자도, 살인에 동원된 군과 경찰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을 묻지 않았다.

홍춘호 할머니와 큰 넓궤에서 헤어진 뒤 비포장 길을 내려오면서 "종교 없애기 운동을 할 것"이라는 명진 스님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처럼 죽창을 들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 '종북'이라고 낙인찍는 시대이다. 죽인 자도, 산 자도 모두 짐승처럼 살았던 광기의 시대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평화의 길' 제주지부 창립식에서 명진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평화의 길" 제주지부 창립식에서 명진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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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진 스님은 이런 상황에 대해 "평화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일부 종교인들은 되레 이념 갈등을 부추기고 한편에서는 사리사욕만 채우고 있다"고 말했다.

"남한테 악한 짓 안 하고 착한 일 하고 돈 생기면 불쌍한 사람 도와주면 이게 부처님의 자비심이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생명을 긍휼하게 여기고 연민을 느끼는 게 종교입니다. 종교는 친절이고 자비이고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겁니다. 나는 이걸 모르는 종교는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70년 전의 악몽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지 않은 섬 제주도에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명진 스님이 사단법인 '평화의 길' 첫 지부를 제주에 세운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관련기사] 제주에 간 명진 스님 "날 어떻게 죽이시겠습니까" (http://omn.kr/1jo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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